이슬람 정원

이슬람권 2013. 12. 28. 02:26

I. 슬람권에서 최초의 정원은 신의 정원인 에덴동산이다. 또 정원에 해당하는 아랍어 Jannah를 낙원의 개념으로 사용하여 그들에게 정원이란 곧 신의 뜻이 재현된 공간이란 뜻이며 그런 만큼 상징적으로 고안되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슬람권에서 정원은 어떤 공간일까? 꾸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낙원에는 몇 개의 정원이 있고 그곳 우물에서는 물이 흘러넘치고 과일도 두 종류씩 열려 있다. 신자들은 비단으로 둘러쳐진 요에 드러누워 있고, 정원의 과일들은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며, 눈을 내리뜬 처녀들, 이제까지 어떤 남자의 손길도 닿은 적 없는 루비와 같이 사랑스럽고 산호처럼 아름다운 처녀들을 발견할 것이다.」


「푸르름이 가득한 목초지가 있고, 그곳에는 물이 흘러넘치는 우물과 과일과 야자나무 석류나무가 있고, 마음 착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들이 있다. 시원한 집에서 사는 젊은 처녀들은 비단과 은팔찌로 꾸미고, 요에 드러누워 마치 흩뿌려진 진주 같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으로 살펴야 할 것은 그들의 낙원이 실제 환경과 달리 녹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원의 구성요소에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흐르는 물에 의한 것으로, 그로 인해 이슬람 정원은 전형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분정원(四分庭園, Chahar Bagh)의 형태를 띤다. 정원을 사분하는 것은 중앙에서 뻗어 나온 네 개의 수로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각각 낙원에 흐른다는 4대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단순히 물 외에도 때에 따라 젖, 포도주, 꿀이 흐르는 강이라 일컬어져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명력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정원 중앙에는 팔각형의 연못이 배치되거나 영묘나 파빌리언(pavilion)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또 풍부하게 공급되는 물로 인해 조성되는 녹지, 즉 식물 역시 이슬람 정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정원에 관한 서술과 묘사에서 등장하는 과실수와 꽃, 그늘은 건조한 흙먼지와 따가운 햇볕에 시달려야 하는 현실, 세속의 공간에서 받은 고통을 달래주는 피난처와도 같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식물과 꽃 문양은 서화나 융단의 도안, 그리고 아라베스크 장식에도 반복해서 표현되며, 동방에서는 당초문으로 그 명칭이 바뀐 채 존재하게 된다.


이슬람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외양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다 지향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아름답다고 소문난 건축물이라고 할지라도 막상 외장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건축적 장식과 문양, 그리고 아낌 없이 사용한 보석의 휘황찬란함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다. 이는 내면의 정신을 더 중시하는 경향에서 비롯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정신이 거주하는 내부 공간을 꾸미는 데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원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이 안주할 수 있는 낙원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그럼으로써 네 개의 수로가 교차하는 중심 연못에서부터 네 개의 벽으로 둘러쳐진 ‘세계’ 전체로 낙원의 원심적 힘이 확장되며, 또한 ‘세계’의 구심적 힘이 중앙을 향해 수축되는 것이다. 또한 그 연못은 분천을 갖추고 있어 둥근 고리를 그리는 잔물결로써 ‘세계’ 전체를 뒤덮는 우주적 힘의 확장과 수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기본적이고 대략적인 이 구조 외에도 이슬람 정원에는 집 밖이라는 세속의 공간, 그리고 집 안이라는 낙원의 공간을 이어주는 이동 영역 역시 중요하게 취급된다. 정원과 건축물 사이의 포치(porch)는 지붕을 덮고 있어 태양빛을 막고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도 외부도 아니라는 점에서 공간의 전이를 이루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며, 궁정 건축에서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이용이나 조용한 관상이 아닌 알현을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런 상징적 의미 외에도 포치는 이슬람 정원이 발흥한 지역의 척박한 기후에 맞게끔 발달해온 증거이다.




II.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최초로 발생하였다. 메카는 사막 기후에 속하는 땅인데 이곳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이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는 반도의 출구를 막고 있던 페르시아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할만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슬람 신흥 세력이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의 문화와 기술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지역의 주민들 역시 남쪽의 아라비아 이슬람 세력과 마찬가지로 메마른 사막에서 유목을 하던 집단이었다. 왕조와 정권이 바뀌어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문화는 연속되듯이 그 지역의 문화는 이전부터 축적되어 온 것이다. 그런 만큼 페르시아 문화권의 생활양식과 건축문화를 계승한 이슬람의 정원에 대하여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화사를 개괄할 필요가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산악 숭배가 성행하였다. 그 이유는 건조한 토양을 적셔주는 것이 봄 해빙기에 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이기 때문이다. 즉 산은 생명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은 산이 없는 곳에서도 그 형상을 본뜬 지구라트를 건설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였다. 풍요로운 산의 모습을 본뜬 만큼 하늘로 솟은 경사진 벽면이나 테라스에는 나무와 관목을 심어 조경하여 정원의 특성을 띠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정원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빌론 공중정원인데 아직 그 실체는 여러 가지로 모호하여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황 상 물을 위에까지 끌어올려 정원을 조성했으리라 추측되며, 그만큼의 수로와 관개, 펌프 시스템 등 수리(水利) 기술이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막에서 수리 시설의 건축은 강력한 왕권과 정립된 신분제에 기반한다. 각 신분에 속한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 업종에 제한이 있어야 상위계급에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대규모 토목 사업에 인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은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과거부터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말한다. 그 척박한 환경에 정주농경을 시작하면서 각 도시에서는 조금이라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혈안이었고, 그만큼 노동력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즉 그들에게 노예제의 존속은 생존의 문제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신분제의 정립과 함께 도시의 군주는 신격화되었고, 사회적 장치는 도시의 생존과 풍요를 위해 우기와 건기, 생명의 재생과 죽음 등 우주의 주기를 따르는 주술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것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신봉하던 선과 악의 끝 없는 대결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또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원류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그만큼 그 세 종교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빛과 어둠, 선과 악에 대한 끝 없는 갈등과 대결, 그리고 종국에 올 선의 승리가 강조되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은 아후라 마즈다이다. 그는 빛과 지혜의 존재이자 최고의 숭배 대상인데 악신이자 거짓과 죽음의 신인 쌍둥이 앙그라 마이뉴와 끝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는 신이다. 그리고 이들의 신봉자인 인간은 선행을 베풀고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선신(善神)의 승리를 돕는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다른 지역의 다신교와 달리 이렇게 강한 이원론적 종교관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이 지역의 풍부한 일조량과 관련 있다. 강한 빛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그림자는 둘 모두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었는데 앞에서 언급한 수리 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들 문화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정원에서는 수로로 끌어들인 물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 그리고 수목과 파빌리언, 포치 등의 인공 구조물이 조성하는 그늘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빛과 그림자, 탄생과 죽음 등 양극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며 세계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역동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산 자의 공간에 죽은 자의 공간을 배치한 영묘는 이런 면모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리라.




III. 슬람의 시작은 아랍인의 종교였다. 최초의 이슬람 성전(聖戰)을 시작하여 제국을 점령하기 전까지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현재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아랍계 씨족들을 베두인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사막을 떠나 도시에 정착, 아랍 문명을 건설한 아랍인들과 달리 본래의 터전을 지켰고, 그에 따라 정착 이전의 생활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들도 장례 풍습은 여타 이슬람권에서의 일반적인 장례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망자가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매장하여 24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하고, 돌이나 나무로 지면에 구획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무덤마다 작은 봉분을 만들기도 하지만 만들지 않기도 하여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이슬람권의 전통 중 많은 부분이 사막 유목생활에서 기인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아랍제국 건설 후 지배층의 무덤으로 영묘를 세워 묘주와 그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가 된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 변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일까?


영묘를 뜻하는 mausoleum이라는 단어는 카리아의 왕이자 페르시아의 태수였던 Mausolus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그만큼 영묘는 페르시아 지역의 영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이다. 그리고 아랍제국이 필연적으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했을 때 페르시아 건축과 함께 영묘도 자연스레 이슬람 문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영묘는 단언컨대 무덤의 주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인데 그것이 이슬람권에서는 성인(聖人) 숭배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애초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러한 성인 숭배를 경계하여 종교 지도자의 사제계급화를 금지했지만 이슬람세계 내부에서 분파가 형성되고, 신과 인간이 성(聖)과 속(俗)으로서 대립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는 신비주의 경향의 수피즘이 발달하면서 예언자나 군 지도자,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는 성소(聖所) 숭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영묘처럼 성소화된 곳에서 그 추종자들이 모여 고인의 가르침과 정신을 기리고자 한 것이었다.


수피즘은 이슬람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한 분파이다. 경전 중심의 교리 학습과 율법 실천을 요구하는 정통 이슬람과 달리 율법을 존중하되 형식을 배격하며, 꾸란의 신비주의적 해석과 종교적 영성을 강조하는 수피즘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하층민이나 구술문화를 중시하는 유목민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한국사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는 삼국시대 말 불교가 교종과 선종으로 분화되어 왕족과 귀족 중심으로 믿어졌던 교종과 달리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의 가르침을 내세우며 서민 사이에 불교를 유행시킨 선종의 특징과도 유사하다. 곧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의 특징을 공유하며 이슬람을 종교적 중심지인 메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퍼뜨린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몽골제국의 이슬람화와 함께 이후 성립되는 티무르제국, 그리고 그 후신인 무굴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티무르제국을 세운 티무르는 투르크인이라고도 하고, 투르크화된 몽골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그는 이슬람교도였고, 이는 몽골제국의 건설자 칭기즈칸의 계승자를 표방하던 그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또한 가장 큰 이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수피즘을 통해 전통 샤머니즘을 신봉하던 몽골인을 이슬람화할 수 있었으며, 그로써 기존 이슬람 세력과 통합하여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구르 아미르를 보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이슬람 건축 양식과 몽골의 술데를 연상케 하는 말총이 내부에 높게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총을 매단 기둥은 몽골이 이슬람세계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풍습으로, 몽골에서는 예로부터 술데에 죽은 이의 영혼이 깃들어 그것을 모시는 자에게 술데 주인이 생전에 누렸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또 구르 아미르는 사실 티무르가 아닌 티무르의 손자였던 무함마드 술탄을 위해 건설된 영묘인데 그 외 티무르의 아들 샤로흐와 또다른 손자 울루그 베그, 그리고 티무르의 스승 피트 쉐이드 오마르의 관이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이는 가까운 가족과 친지 등과 묘실을 함께 사용하는 아라비아 및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도 보이는 풍습이며, 그만큼 티무르제국이 포용했던 문화가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티무르의 무덤을 기리는 것은 그의 정신이 산 자의 세계에 드리워지길 기원했던 것이리라.




IV. 슬람권에서 정원은 물, 식물, 빛, 그림자 등의 요소를 이용해 신의 세계인 낙원을 재현해내는 공간이다. 물을 끌어들여 향기롭고 다채로운 화초와 배를 채워주는 과실수를 심어 신이 주신 풍요에 대하여 감사하고, 물과 함께 그 식물을 키워주는 햇빛, 높은 나무와 파빌리언, 포치 등이 만들어주는그늘 속에서 둘의 대비를 관찰하고 즐기는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교차하는 빛과 그림자를 보며 신에의 귀의와 선과 정의의 실현을 다짐하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신앙심은 정원에서 끊임없이 둥근 잔물결을 그리는 분천과 연결된다. 안쪽에서 생성되어 바깥쪽으로 퍼지는 물결은 세계의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퍼져나가는 낙원의 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계속해서 물결침으로써 세계에서부터 낙원 중심을 향해 작용하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낙원이 가지는 성성(聖性)과 속세(俗世)의 속성(俗性)이 조화를 이루고, 그럼으로써 속세 공간의 정원이 신성한 낙원으로 변화, 엘리아데가 말하는 성현(hierophany)의 예시가 된다. 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알라의, 세속적으로 해석하자면 황제의 힘과 속인(俗人)들의 구도를 취해 알라 또는 황제로 이야기되는 성성을 중앙화시키고, 지도자의 무덤으로써 시각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영묘라는 공간을 통해 종교와 세속을 아우른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그들은 공간 자체로서 재림하는 고인을 오감으로 느끼게 된다.




티무르제국의 후신인 무굴제국의 터를 잡고 그 영토로 진입한 것은 초대황제인 바부르였다. 하지만 제국의 기틀을 닦았던 것은 2대 황제인 후마윤이었다. 이슬람 국가로서 무굴제국은 힌두 세력과 빈번한 전투와 진퇴를 거듭하면서 세력을 굳건히 하였고, 후마윤의 생에는 15년 간의 망명 생활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로써 외부의 문물과 원주민 문화를 결합하여 무굴양식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의 영묘로서 후마윤 묘지는 이슬람의 가치관을 전파하고 포교하며, 타문화에 대하여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로써 무굴양식의 정원은 건축의 발달과 함께 이후 타지마할이라는 영묘에서 그 정수를 뽐내는 것이다.






「인종, 기온의 고저와 풍토, 사회적 조건, 그리고 이슬람권에 속해 있는 지리적 범위 등은 실제로 다양하고 광대하다. …이슬람은 그곳에서 단순히 종교로서의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이들 지역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방식 그 자체다.」(Brookes 2003[1990],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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